Laboratorian Interview

진단검사의학 전문의로서 나의 버킷리스트

Research Highlight 역사보존위원회 기획연재

기창석

GC지놈 대표이사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임상강사를 하던 2001년 여름 어느 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한 환자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 병원을 거쳐 제가 근무하던 병원 신경과에서 강직성 하반신 마비로 진단 받은 후 본인과 가족이 왜 이 병에 걸렸는지 원인을 꼭 찾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차세대염기서열분석(Next-Generation Sequencing; NGS) 검사를 시행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원인 유전자와 변이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어느 병원에서도 강직성 하반신 마비에 대한 유전자검사를 시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간곡하게 유전자검사를 원하는 환자 분에게 지금 당장은 유전자검사를 시행할 수 없고, 새로 검사법을 만들어서 검사를 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 노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환자분을 돌려보내고 나서 강직성 하반신 마비라는 질환과 원인 유전자에 대해 검토를 했는데, 원인 유전자도 다양하고 유전자의 크기도 작지 않아서 검사를 시행할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SPAST 유전자부터 검사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는 새로운 유전자에 대한 염기서열분석 검사를 시행할 경우, PCR Primer 제작, PCR 셋업, 시퀸싱 및 결과 판독 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직접 했는데, 다행히 SPAST 유전자 에서 기존에 보고되지 않았던 새로운 변이가 발견되었고, 증 상이 있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포함하여 총 20명의 가족 구성원을 검사하여 질환의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정리하여 새로운 SPAST 유전자 변이에 의해 발생 한 상염색체 우성 강직성 하반신 마비 가계를 논문으로 발표 하였습니다. 이후 환자분의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생명 윤리법에서 태아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질환으로 등록되었 고, 몇 분의 가족에 대해 산전 유전자검사를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에서 대를 거듭하여 발병하던 질환이지만 한번도 우리 나라에서 확정 진단된 적 없던 유전질환에 대해 마침내 원인 유전자와 변이를 찾았던 이 때의 경험은, 마치 여러 단서를 조합해서 미스터리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 고, 제가 유전진단 분야를 전공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유전 질환의 진단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양한 유전질환을 우리나라 최초로 진단하고 논문으로 발표 하였고, 병원에서 정식으로 유전자검사를 시행할 수 있도록 보험에 등재 했습니다. 또한, 환자 한 명 또는 한 가계가 아니라 동일 질환으로 임상적 진단을 받은 다수의 환자에 대해 유전자검사를 시행하여, 특정 질환을 가진 한국인에서 원인 유전자와 변이의 분포를 밝히는 연구도 계속 수행하였 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인 환자에 대한 유전자검사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인종 또는 민족에 따른 유전적 배경과 차이를 밝히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정 유전질환의 원인 유전 자와 변이를 밝히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누군가 원인 유전자를 규명해둔 질환만 유전 자검사를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늘 아쉬웠습니다. 인간 게놈프로젝트의 완성과 유전학 기법의 발전 및 자동염기 서열분석기의 등장으로 Nature Genetics, 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 등 인간유전학 분야의 최고 학술지에 매주, 매월 새로운 질환의 원인 유전자가 밝혀 졌다는 논문들이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에서도 2007년 김희진, 김종원 교수 연구진이 X-linked Charcot-Marie-Tooth 5 (CMTX5)의 원인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이후 몇 개 질환에서 세계 최초 유전자 규명 사례가 발표되면서 나도 우리나라 최초가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성과를 거두는 연구를 주도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전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규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즉, 원인 유전자가 밝혀지지 않은 유전질환을 가진 환자를 만나야 하고, 그 환자가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새로운 유전자를 찾기에 충분한 가계와 협조적인 가족을 만나야 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 변이 형태에 따라 적절한 유전자검사 기술을 알맞게 적용해야 합니다. 신규 유전자 후보를 찾았더라도, 동일한 질환을 가진 또다른 가계나 환자를 찾을 수 없거나, 기능 연구에서 유전자 질환 연관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어렵 거나, 공동 연구진과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대부분 실패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더라도 전세계 어디에 있을지 모를 다른 연구자가 하루라도 먼저 논문을 발표하면 최초의 타이틀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에, 신규 유전자의 세계 최초 발견은 마치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이나 남극점 도달 혹은 경마 레이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2009년 사람의 모든 유전자 엑손 부위를 선택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엑솜염기서열분석(Exome Sequencing) 방법이 개발된 이후, 유전질환의 원인 유전자 발견이 더욱 가속 화되면서 세계 최초 유전자 발견 가능성은 오히려 더 떨어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이전에 보고되지 않은 매우 특이한 질환을 가진 환자가 있다는 순환기내과 교수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환자분은 심장대동맥과 판막에 광범위한 석회화(Calcification) 소견을 보였는데, 심혈관 증상과 일견 관련 없어 보이지만 선천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점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환자분에게 유전자 검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채혈을 권유했지만, 아쉽게도 유전 자검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이 환자분이 저에게 세계 최초의 유전질환 유전자 규명의 기회를 줄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환자분이 다녀간 사실도 잊어버리고 바쁜 일상을 이어가던 2013년 어느 날, 일년 전 다녀간 환자분의 아들이 응급실로 왔습니다. 아들도 역시 심장대동맥과 판막에 석회화가 있었고, 어릴 때 선천 녹내장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환자와 아들이 매우 특이한 조합의 증상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가족력을 자세하게 조사하 였는데, 몇 명의 가족이 심장질환과 녹내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어 우성 유전 양상을 보이는 유전질환이 맞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질환명을 찾기 위해 PubMed와 구글 검색을 열심히 했음에도 알지 못한 상태로 엑솜염기서열분석을 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중 질환을 가진 5명과 질환이 없는 2명에 대해 엑솜염기서열분석을 시행하였는데, 놀랍게도 이전에 질환 관련성이 보고된 적이 없는 새로운 유전자의 변이가 이 가족의 질병 양상과 잘 맞았습니다. 운이 따라 주어서인지 이전에 유전자검사를 시행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던 선천 녹내장 환자 중 한 명에서 동일한 유전자의 또 다른 변이가 발견되었고, 공동 연구진들과의 협업을 통해 질환 관련성을 뒷받침하는 기능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논문 발표가 늦어져서 세계 최초 유전자 규명의 기회를 놓칠세라 정말 모든 연구진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주었고, 여러 행운이 겹치면서 2015년 가을 세계 최초로 유전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국내 최초로 유전질환의 원인을 확인하는 연구에 참여하여 주저자 또는 공저자로 논문을 발표한 횟수를 세어보면 대략 백여 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세계 최초로 유전질환 원인 유전자를 규명하는 연구에도 몇 번 참여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전 질환 연구와 유전진단 검사 개발, 보험 작업을 지치지 않고할 수 있었던 동력은 최초와 최고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전질환을 진단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유전질환에 대한 검사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전진단을 잘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유전진단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난 이후 뜻밖에도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새로운 유전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찾았지만, 그 다음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또, 유전진단을 위한 검사 기술과 장비, 시약은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반면 유전 진단 분야와 더불어 부전공으로 삼았던 감염질환의 분자 진단 분야는 2000년 초반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진단시 약이 거의 없었지만, 국내 분자진단 전문기업들이 제품개발과 성능 개선에 힘쓴 결과 이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국산 진단시약과 장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감염질환 분자진단 분야나 스마트폰, 자동차, 건설, 조선처럼 우리나라 제품과 기술이 세계 수준인 것도 많은데, 정작 유전진단 분야는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단검사의학 전문의로서의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Sanger 방식으로 염기 서열분석을 하던 때와 달리 고가의 장비와 분석 서버, 생물 정보학 인력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NGS 시대로 접어들 면서 병원이 유전진단을 선도하기 어려워졌다는 현실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2018년 임상유전체분석 회사로 옮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고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잘 하는 결정인지 저 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NGS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위기와 기회를 임상유전체분석 회사에서 찾기로 결정 했습니다. 20년 이상 몸 담았던 병원을 떠나 회사로 직장을 옮긴 지금 제가 하고 싶은 것은, NGS를 이용한 임상유전 진단을 가장 잘 하는 기관을 만드는 것과 우리나라에서 꼭필요한 유전자검사를 시행하는 기관이 되는 것, 또 세계적인 임상유전체 진단 기술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의 바램처럼 임상 현장에서 꼭 필요하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 없는 검사를 개발하거나 시행할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조금씩 생기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과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유전자검사를 개발하는 성과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작은 도전이 우리 나라 진단검사의학 분야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